15-16면/소프라노 유연수 '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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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10-11 19:39 조회1,11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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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 나의 음악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만난 스승 "연습을 잘 해오는구나, 너는 최고의 성악가가 될 수 있어"
글=소프라노 유연수
Ma rendi pur contento Della mia bella il core♬ 내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여전히 만족시켜 주오.... 노래를 하다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멜로디와 가사에 매료된다. 이렇게 늘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 부모님께서 내게 이런 예술의 재능을 물려주신 것에 대해서 참 많은 감사한 마음으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가 만드신 라디오를 통해 항상 음악을 접하면서 살았다. 음악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미술가가 꿈이셨지만 몸이 불편한 나를 키우시기 위해 언론사의 기술직으로 일하셨다. 아버지는 그 좋은 손재주로 라디오를 만드셨고 그 라디오를 통해서 늘 음악을 들으며 나는 성장했다. 그 때 심심찮게 들었던 노래, 아직도 기억하는 노래가 ‘희망의 나라로’였다. 엄마가 성악가의 꿈이 있으셨지만 엄마가 못 이루신 그 꿈을 지금은 딸이 이루고 있다.
어려서의 삶은 참 가슴 아픈 시간들이었다. 지금이야 각 학교마다 장애인 화장실이 따로 있지만 그때 당시는 재래식 화장실인데다 몸이 불편하다 보니 학교에서 화장실 이용하는 것도 너무나 어려웠고 왕따와 놀림의 아픈 시간들이었다. 그런 나를 위해 엄마는 그 스트레스를 "피아노에 풀라"며 어려운 살림에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것이 내가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에 대한 큰 역할을 했었다. 사실 피아노는 사주셨지만 음악가의 길을 가라고 사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전공을 하려면 레슨을 받아야 하고 일일이 레슨을 받기에는 재정적인 환경여건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서 동네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운 것이 전부이지만 나의 음악적인 재능과 절대음감이 나를 그냥 놔두지를 않았다. 그렇게 고3이 지나가고 내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자격증을 따고 생활하던 중 도저히 음악을 안 하고서는 안 될 것 같아 결국은 늦은 나이에 음악 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그 당시 Canada에 있는 Royal conservatory 음악원이 한국에 들어와서 그곳에서 전문적인 음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음악 공부의 첫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Royal음악원에서는 6년을 공부했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고 성적이 부족해 1년을 더 유급했던 원인도 있었다. 처음 시작은 피아노로 시작했지만 성악으로 전과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나는 양쪽 다리의 소아마비 장애로 페달을 온전하게 밟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른쪽 발 페달을 밟을 수는 있었지만 왼쪽 페달은 아예 밟을 수가 없었고 공교롭게도 왼쪽 페달을 밟아야 하는 곡을 공부 하게 되어 참 난감했었다. 더욱이 이 피아노를 통해 나는 연주자의 길로 갈 수 있을까를 놓고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대가 좋다. 그래서 연주자의 길로 가는 것이, 무대를 서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피아노 같은 경우는 연주자를 꿈꾼다면 어려서부터 교육이 시작된다. 피아니스트의 길은 몇 살 때부터 시작하느냐가 관건이기도 하다. 나는 너무 늦게 시작했다. 그것도 늦어도 엄청 늦어버렸다. 피아니스트의 길로 가기엔 너무 늦어버려서 나는 나의 상황을 인지할 수가 있었다. 미련을 버릴 수가 있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성악의 달란트가 있다는 것이 교회 성가대 지휘자를 통해 발견됐다. 내게 성악의 달란트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그저 노래를 배우지도 않고 잘 한다 라고만 느꼈었지만 성악가의 길로 갈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를 못했었다. Diploma수료를 1년 앞두고 그동안 배웠던 피아노의 공부한 결과물이 아까워서 복수전공으로 피아노와 성악의 길을 동시에 가기 시작했다. Diploma 수료하는 1년은 죽을 만큼 고생을 했다. 하루 온 종일 연습에 매진해야 했었다. 아침 9시부터 피아노 치면 12시에 점심 먹고 잠시 쉬고 다시 1시부터 연습을 했고 4시부터 6시까지는 성악 연습을 했으며 6시 저녁을 먹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에 매달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료를 할 수가 없었다. 이 음악원은 연주자를 배출해내는 기관이기 때문에 수료를 받기 위해 수료 시험이 하나의 리사이틀이었고 나는 완전히 프로의 수준급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느 대학교이든 졸업하려면 똑같은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피아노와 성악 Diploma를 받게 되었고 성악 또한 전문가로서 무대의 꿈을 그리며 어렵게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이 유학을 결정하기까지 엄마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아버지도 그런 엄마의 뜻에 따라 열렬히 응원해주심은 나에게 더 없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 유학길 또한 만만치 않은 과정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든지 내 눈에서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렇게 원하고 그렇게 가고 싶었던 유학이었지만 재정이 넉넉지 못한 상황에서의 유학길은 고생 그 자체였다. 다른 유학생들은 몸이 건강하니 부족한 재정을 채우며 공부하려고 아르바이트도 했었다. 한인 식당에 가서 설거지와 서빙을 하며 부족한 재정을 채웠지만 나는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그나마 그마저도 할 수가 없어서 내 방을 방이 필요한 다른 유학생에게 잠시 빌려주고 아침과 저녁 밥을 해주며 나는 거실 쇼파에서 쪽잠을 자며 돈을 융통했었다. 유학생활에서 집을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오죽하면 집만 잘 찾아도 유학 생활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는 말이 있었을까...
나 또한 집을 찾기까지 쉽지 않았다. 남의 집을 한 달씩 연연하면서 한쪽 다리만 지탱할 수 있었기에 오른쪽 다리로 걸으며 집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나 무리하게 걸으며 집을 찾은 것이 내 몸에 무리였다. 무릎에서 열이 나며 통증이 몰려와 다리를 제대로 뻗고 자지도 못했었다. 얼마나 서럽든지, 내가 왜 이 멀리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침대에서 펑펑 울었다. 그렇게 나의 유학생활은 시작 됐다. 너무 힘들어서 그곳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정도로의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어렵게 유학비를 보내주시는 부모님 생각하면서 죽고 싶다는 마음 보다는 노래하는데 더 집중했고 힘들고 어려울 때는 노래로 내 마음을 풀어나갔다. 그렇게 나는 유학생들 사이에서 연습벌레로 별명이 붙여졌다.
하루는 엄마와 국제 전화로 통화하면서 “엄마, 나 감사해요. 이렇게 유학까지 보내주셔서 너무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어요, 개똥밭에 구르면 개똥만 묻는데 여기는 온통 성악만 가득해서 여기저기 굴러도 음악이에요.”라고 했던 기억도 있다.
나의 선생님 Maria Luisa Cioni
Royal음악원이 Canada에서 온 분원인지라 유학을 가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선, 후배 관계였다. 나는 선배도 후배도 없었다. 다른 유학생들은 한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와 선후배가 있어서 서로 이끌어주고 도와주는데 나는 밀라노에서 어느 선생님이 대가이며 어느 선생님이 좋은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유학생들이 그런 정보들을 아끼고 잘 흘리지를 않았다. 어렵사리 교회의 아는 사람을 통해 만난 선생님이 Cioni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젊었던 그녀의 활동 당시 유명한 성악가였고 내가 유학하러 갔을 때에는 연세가 있으신 할머니 선생님으로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대가로 유명했다. Cioni 선생님께 배우는 학생들 대부분이 소리를 너무나 멋지게 내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유학생들이 치오니 선생님께 배우려고 줄을 섰다는 얘기도 들었다. 과연 나를 받아주실까? 학생들이 그렇게 줄 서 있다는데...
다행히도 나는 치오니 선생님과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녀와 공부하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최고로 꼽는다. 그리고 선생님께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나는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다른 학생들은 연습을 잘 안 해오는데 너는 몸도 불편한 학생이지만 연습을 너무나 잘 해온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최고의 성악가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나는 그 말씀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었다.
이렇게 만남의 복으로 그곳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지금의 나는 무대에서 노래를 하는 성악가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곳이 밀라노이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눈물을 많이 흘린 곳이기도 하지만 나는 늘 밀라노가 그립다. 나의 제 2의 고향 같은 곳 밀라노...
나는 가끔씩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그 음악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황홀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음악인으로, 뼛속까지 예술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누구도 부럽지가 않다.
음악은 나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음악도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감정도 같이 따라간다. 그래서 음악을 잘 선택해서 들어야 한다.
나에게 위로가 되는 음악, 들으면 행복해지고 행복을 느끼는 음악, 슬프지만 같이 공감되어지고 잠시나마 내 마음에 감동이 되는 음악을 들으면 일상 생활하는데서 큰 힘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노래를 부를 때 사람들이 위로 받고 감동되었다면 나는 그 순간이 가장 기쁘다. 그게 음악가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요즘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로 나를 포함한 모든 연주자들이 연주를 멈춰야만 하는 상황이 참 가슴 아프다. 연주자들은 무대에 섰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도 이제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래서 나는 삶을 노래하고 싶고 삶을 노래하고 있으며 삶을 노래하는 소프라노 성악가 유연수이다.
사진설명/소프라노 유연수씨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기전인 2018년 10월 13일 인천국제공항 인근 씨사이드파크 야외무대에서 멋진 성악을 들려주고 있다. 꿈꾸는마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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